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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예고편만 봤을 때는 꽤 기대가 됐습니다. 살인범을 납치해서 피해자 가족이 직접 복수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 거기에 블랙코미디 톤까지. 근데 막상 극장에서 나오면서 든 첫 감상은 "이 소재가 너무 아깝다"였습니다. 배우들은 미쳤는데, 영화가 그걸 못 따라갔어요.
블랙코미디라고 하기엔 너무 심심했습니다
경주기행은 8월 26일 개봉한 김미조 감독의 두 번째 장편입니다. 감독은 2020년 갈맥으로 데뷔했고, 이번에 오랜만에 신작을 들고 왔습니다. 러닝타임은 약 110분, 15세 이상 관람가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8년 전 경주에서 수학여행 중 납치·살해당한 막내딸 경주. 그 사건으로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 가족이 있습니다. 엄마 옥실(이정은)과 세 딸, 첫째 장주(공효진), 둘째 영주(박소담), 셋째 동주(이연)가 막내의 기일에 맞춰 경주로 여행을 떠나는데, 그게 단순한 추모 여행이 아닙니다. 살인범 백상현(변요한)이 출소하자, 아는 언니 흥신소에 맡겨 그를 납치해 차에 싣고 경주로 향하는 겁니다. 제목 '경주기행'이 중의적인 이유가 여기 있어요. 지명으로서의 경주, 막내딸 이름 경주,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뜻하는 '기행(奇行)'까지.
설정만 놓고 보면 블랙코미디로서의 포텐이 넘칩니다. 블랙코미디란 죽음이나 범죄처럼 무거운 소재를 역설적 유머로 비틀어 웃음과 불편함을 동시에 자아내는 장르입니다. 쉽게 말해, 보는 내내 웃으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그 느낌이요. 제가 직접 봤는데, 그 찜찜한 쾌감이 거의 없었습니다. 의도는 보이는데 발화가 안 됐어요.
예를 들면 중반부에 셋째 동주가 복면을 쓰고 중고차를 사러 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차 안에 범인 DNA가 남아서 차를 바꿔야 하는 상황인데, 거기서 중고차 판매자가 우연히 프로레슬러 팬이라 동주를 알아보는 설정이 나옵니다. 발상 자체는 웃겨요. 근데 그 장면이 너무 심심하게 처리됩니다. 실제로 보면서 '이걸 이렇게 끝내나?' 싶었어요. 블랙코미디의 핵심은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는 그 구체성에서 오거든요. 세부 묘사가 빠지니까 웃음도 빠져버린 겁니다.
- 중고차 판매자·복면 장면 — 발상은 좋지만 디테일 생략으로 무기력하게 끝남
- 땅 파다 도굴꾼으로 오해받는 장면 — 오해 받는 과정을 통째로 생략, 쫓기는 장면으로 바로 컷
- 남건 출연 흥신소 씬 — 초반 유일하게 케미가 살아있던 구간
참고로 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따르면 블랙코미디 장르는 국내에서도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는데, 이 장르의 특성상 '농도'를 잘못 잡으면 전체 톤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경주기행이 딱 그 경우였습니다.
연출이 장르를 못 잡으면 배우가 고생합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아깝다고 느낀 지점이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거기에 변요한까지. 배우 라인업만 보면 뭘 해도 될 것 같은 조합이에요. 실제로 연기는 미쳤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공효진과 이정은이 본고차 앞에서 치고받는 장면은, 솔직히 그 장면만큼은 소름이 돋았습니다.
근데 이정은 씨의 클라이맥스 연기를 보면서 든 감정이 '와, 살렸다'가 아니라 '안타깝다'였어요. 영화 전체의 약점을 배우 한 명의 연기력에 기댄다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여기서 제가 쓰는 표현이 '연기 차력쇼'인데, 차력쇼란 초인적인 힘을 과시하는 퍼포먼스를 뜻합니다. 즉, 연기 자체는 압도적이지만 그걸 뒷받침하는 서사 구조가 없으니 혼자 들고 있는 형국이라는 겁니다.
톤의 문제도 컸습니다. 살인범 백상현이 탈출하면서부터 영화가 갑자기 범죄 스릴러로 돌변합니다. 스릴러란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려 관객을 조여오는 장르인데, 그 전환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마치 다른 영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블랙코미디로 시작해서, 가족 드라마처럼 흐르다가, 스릴러로 끝나는 구조. 어떤 분들은 "장르를 넘나드는 시도 자체는 흥미롭다"고 볼 수도 있는데, 제가 보기엔 넘나드는 게 아니라 표류하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출처: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관객 평가 지표를 보면, 장르 일관성은 관객 만족도와 높은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특히 멀티장르 영화일수록 각 장르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만 긍정 평가를 받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경주기행이 정확히 그 함정에 빠진 겁니다.
가족드라마로 갔다면 어땠을까, 자꾸 그 생각이 듭니다
경주기행이 실패한 지점이 많지만, 그래도 제가 계속 아쉬움을 느낀 건 '이 소재가 사실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 가족에게는 볼수록 묘한 관계가 있어요. 결혼 후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복수 계획에 내심 불편해하는 첫째. 사법고시를 포기한 채 어딘가 예민하고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둘째. 그리고 막내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데 자신이 일조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사는 셋째. 엄마는 막내를 잃은 이후 복수에만 집착하며 남은 딸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요.
이 관계들이 군데군데 보입니다. 근데 제대로 파고들지를 않습니다. 가족 서사 안에서 인물들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다 조금씩 회복해 가는 내러티브, 즉 캐릭터 아크를 제대로 그리지 못했습니다. 캐릭터 아크란 한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변화하는 심리적·감정적 곡선을 말합니다. 이 영화는 그 곡선이 너무 얕아요. 둘째가 짐 싸고 나가다가 엄마 편지 보고 돌아오는 장면은, 솔직히 너무 전형적인 클리셰입니다. 클리셰란 과도하게 반복 사용되어 신선함을 잃은 표현이나 설정을 뜻하는데, 저는 그 장면에서 감동보다는 "이 패턴이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차라리 범인이 탈출하지 않고, 이 가족이 경주를 돌아다니며 알리바이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서로의 상처와 불화를 꺼내놓고 다시 봉합해 가는 흐름으로 갔다면 어땠을까요. 어떤 분들은 "그러면 너무 평범한 가족 영화가 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게 이 영화가 가진 신선한 설정을 더 잘 살리는 방향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납치라는 극단적 장치를 품고서 정작 드라마는 잔잔하게 가는, 그 대비가 블랙코미디의 진짜 맛이 될 수 있었거든요.
결말 역시 아쉬웠습니다. 감독이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는 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결말에 설득력이 담기려면 빌드업이 충분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어수선하게 소비되어버려서 마지막 장면이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5세 관람가가 아닌 청소년 관람불가로 가서 기세 있게 밀어붙였다면 색깔이 더 선명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경주기행 배우들 연기는 볼 만한가요?
A. 배우들 연기는 영화에서 가장 확실한 장점입니다. 이정은의 클라이맥스 연기, 공효진과 이정은의 감정 충돌 장면은 진짜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어떤 분들은 "연기만 보고 가는 영화"라고 느낄 수 있다고 보는데, 저는 그게 칭찬인 동시에 영화의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Q. 블랙코미디 요소가 진짜 있나요? 코미디 영화로 봐도 되나요?
A. 블랙코미디라는 방향성은 분명히 의도된 것 같습니다. 초반부 흥신소 장면이나 자매들의 대화에서 그 느낌이 살짝 납니다. 다만 중반 이후부터는 톤이 흔들려서, 코미디 영화로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웃음보다는 어수선함이 더 강했어요.
Q. 변요한이 나온다고 하던데 비중이 얼마나 되나요?
A. 변요한은 노런티(no-credit, 크레딧 미표기) 출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극 중에서 살인범 백상현 역으로 등장하는데, 중후반부부터 비중이 생깁니다. 인상적인 장면은 있지만 분량 자체는 주연 가족들보다 훨씬 적습니다.
Q. 경주기행,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해피엔딩인가요?
A.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해서 말씀드리면,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이 결말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은 받았습니다. 단순히 해피엔딩이냐 배드엔딩이냐로 나누기 어렵고, 열린 여운을 주는 편입니다. 다만 그 결말에 설득력이 충분히 담겼는지는 보는 분마다 다르게 느낄 것 같습니다. 저는 빌드업이 부족해서 결말의 무게가 덜 느껴졌다고 봅니다.
결론
경주기행은 소재만큼은 정말 신선합니다. 설정지, 캐릭터 구성, 배우 라인업,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습니다. 근데 막상 완성된 영화는 블랙코미디도, 가족드라마도, 범죄 스릴러도 아닌 어딘가에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의 재료를 가지고 이 정도 결과물이 나왔다는 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아까웠던 케이스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배우들의 연기가 궁금하신 분, 특히 이정은·공효진의 감정 연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극장에서 볼 이유는 있습니다. 다만 블랙코미디의 통쾌함이나 기세 있는 복수극을 기대하신다면,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가시는 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