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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은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거머쥔 첫 번째 비영어권 영화입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단순한 스릴러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볼수록 화면 구석구석에 심어둔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사물들을 하나씩 꺼내 읽으면, 이 영화가 왜 '계급 우화'로 불리는지 비로소 보입니다.
계급은 공간에 새겨진다 — 수직 구조와 반지하
기생충의 공간 문법은 단순합니다. 위에 있으면 부유하고, 아래에 있으면 가난합니다. 박 사장의 저택은 언덕 위에 있고, 기택의 집은 반지하입니다. 두 집을 잇는 건 끊임없는 계단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두 번째로 볼 때 가장 오래 멈춰서 생각한 장면이 바로 폭우 씬이었습니다. 박 사장 가족에게 그날 밤 비는 캠핑을 망친 아쉬움이자, 다음 날 미세먼지를 씻어낸 낭만이었습니다. 반면 기택 가족에게는 집이 통째로 잠기고 오물이 역류하는 재난이었습니다. 같은 하늘에서 내린 비가 이토록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 이게 이 영화의 계급 감각을 가장 압축해서 보여주는 순간이라고 느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인물들을 끊임없이 오르내리게 합니다. 캠핑에서 쫓겨나듯 돌아온 기택 가족이 폭우 속에서 부잣집 언덕을 내려와 반지하까지 도달하는 그 긴 계단 하강 장면은, 상승이 얼마나 더디고 어려운지, 그에 반해 추락은 얼마나 순식간인지를 공간 자체로 증명합니다. 올라가는 데는 온갖 술수가 필요했지만, 내려오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수직 층위가 있습니다. 저택 지하에 숨어 사는 근세의 존재입니다. 반지하보다도 더 아래, 지하 벙커에 몇 년째 유폐된 그는 매일 계단 조명을 깜빡여 모스부호로 감사 인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위층 사람 중 아무도 그 신호를 읽지 못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이런 존재를 '몫 없는 자(the part of no part)'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몫 없는 자란, 사회 안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목소리가 의미 있는 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근세의 모스부호가 정확히 그 은유입니다. 언어이지만 소음으로 취급되고, 신호이지만 고장 난 불빛으로 여겨집니다.
- 언덕 위 저택 → 반지하 → 지하 벙커: 세 개의 수직 층위가 계급을 공간으로 시각화
- 같은 폭우가 위층에는 낭만, 아래층에는 재난으로 갈린다
- 근세의 모스부호: 존재하지만 읽히지 않는 '몫 없는 자'의 목소리
아비투스 — 위조할 수 없는 몸의 계급
기택 가족의 침투 작전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합니다. 학력을 위조하고, 경력을 지어내고, 서로 남인 척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잘 해냅니다. 과외도, 운전도, 살림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능력만 보면 그 자리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끝내 그들을 무너뜨린 것은 능력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냄새였습니다. 박 사장은 기택에게서 "지하철 타는 사람들한테서 나는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복을 입혀도, 그 냄새만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 현상을 아비투스(Habitus)라고 불렀습니다. 아비투스란, 계급이 신체에 각인된 무의식적 성향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오랜 시간 특정 환경에서 살아온 방식이 말투, 몸짓, 취향, 심지어 냄새에까지 스며들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돈을 좀 번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몸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입니다(출처: Britannica — Habitus).
제 경험상, 이 아비투스 개념이 영화 바깥에서도 꽤 자주 목격됩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 "뭔가 다른 분위기"를 감지하는 순간들, 그 감각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계급을 무의식 중에 읽고 있는 것입니다.
박 사장이 냄새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표현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대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냄새는 후각으로 계급의 경계를 긋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파티 당일, 박 사장이 쓰러진 근세 앞에서 무심코 코를 막는 그 몸짓이 방아쇠가 됩니다. 기택은 자신의 존재가 냄새 하나로 환원되어 멸시당하는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위장은 겉모습을 바꿀 수 있어도, 몸에 새겨진 것까지는 바꾸지 못한다는 것, 봉준호는 이 냄새 하나로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물신주의 — 수석이 가라앉은 곳, 기우의 꿈도 가라앉는다
기우의 친구 민혁이 선물로 가져온 산수경석, 즉 관상용 수석은 이 영화에서 가장 묘한 사물입니다. 민혁은 재물과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말하고, 기우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집이 홍수로 잠기는 순간에도 그는 이 돌부터 챙깁니다. 솔직히 처음 볼 때는 단순한 극적 장치라고 봤는데, 이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이런 현상을 물신주의(Fetishism)라고 불렀습니다. 물신주의란, 본래 인간이 만들거나 의미를 부여한 사물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고 그 앞에 매달리는 현상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인간이 만든 것에 오히려 인간이 지배당하게 되는 역설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Marx). 기우의 수석이 정확히 그 표상입니다. 돌 자체에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우는 그 돌에 상승과 행운이라는 의미를 투사합니다. 이 돌만 있으면 우리도 양지로 올라갈 수 있다는 헛된 믿음, 그것이 돌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수석의 운명이 의미심장합니다. 재물을 가져다준다던 돌은 결국 흉기가 되어 기우의 머리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기우는 그 돌을 계곡물에 놓아줍니다. 헛된 희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돌이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그 돌에 얹혀 있던 꿈의 무게를 더는 견딜 수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생충 결말을 보면, 기우는 또 다른 물신주의에 빠집니다. 지하에 아버지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 그는 다짐합니다. 돈을 벌어 그 저택을 사겠다고. 하지만 화면은 그 장면이 기우의 상상임을 바로 폭로합니다. 현실의 기우는 여전히 반지하에 있습니다. 그 집을 사려면 수백 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수석 대신 이번엔 불가능한 계획에 매달리는 것, 구조는 똑같습니다. 제가 이 결말을 보며 가장 잔인하다고 느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봉준호는 희망을 보여준 뒤 곧바로 현실의 반지하로 우리를 돌려보냅니다. 계단은 끝나지 않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기생충 결말에서 기우의 계획은 실현 가능한 건가요?
A. 영화 안에서 이미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 암시됩니다. 그 저택을 살 돈을 모으려면 수백 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이 기우의 상상임을 화면이 바로 폭로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기생충 결말은 희망을 보여주는 척하면서 그것이 물신주의적 환상임을 동시에 폭로하는 구조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저도 그쪽으로 읽었습니다.
Q. 기생충에서 냄새가 그렇게 중요한 상징인 이유가 뭔가요?
A.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우기가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입니다. 봉준호가 냄새를 계급 표식으로 선택한 건, 아비투스 개념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아비투스는 계급이 신체에 무의식적으로 새겨진 것인데, 냄새야말로 의지로 쉽게 바꿀 수 없는 신체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냄새를 계급 경계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이 이 영화를 단순한 범죄극과 구분 짓는 핵심이라고 봅니다.
Q. 지하에 숨어 사는 근세는 무엇을 상징하나요?
A. 근세는 사회가 지워버린 존재, 즉 시스템 밖으로 밀려난 유령에 가깝습니다. 빚에 쫓겨 지하에 숨은 그는 통계에도, 시야에도 잡히지 않는 인물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명제를 구현한 캐릭터로 읽힙니다. 지하에 묻어둔 것이 파티 당일 지상으로 올라와 모든 것을 폭발시킨다는 서사 구조가 그 상징을 완성합니다.
Q. 기택 가족이 실패한 진짜 이유는 능력 부족인가요?
A. 능력 부족이 아니라는 점이 이 영화의 핵심 비틀기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과외도, 운전도, 살림도 잘 해냈습니다. 그들을 무너뜨린 건 위조할 수 없는 아비투스, 즉 몸에 새겨진 계급의 흔적이었습니다. 능력주의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영화가 그 전제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고 봅니다. 출발선이 다를 때 능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결론
기생충을 다시 볼 때마다 제가 멈추는 장면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엔 계단이었고, 두 번째엔 냄새 장면이었고, 세 번째엔 기우가 수석을 손에 든 채 잠긴 집에서 서 있는 그 짧은 컷이었습니다. 봉준호는 사물 하나하나에 계급론, 물신주의, 아비투스 같은 개념들을 압축해 심어두었고, 그것들이 결말에서 한꺼번에 터집니다.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저도, 보는 사람도, 모두 그 계단 어딘가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위를 올려다보며 언젠가 저기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각자의 수석 하나를 품에 안고 삽니다. 봉준호는 그 돌을 내려다보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돌이 실은 우리를 가장 깊이 가라앉히는 무게일 수 있다는 것을 환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