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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계유정난, 유해진 박지훈, 결말해석)

hatiiiiin 2026. 7. 2.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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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처음엔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도 "또 사극이겠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SNS에서 입소문이 퍼지더니 관객 수가 600만을 넘기 시작했고, 결국 저도 극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중엔 영화에 관심 없는 저희 부모님도 직접 보러 가셨다고 하셔서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이해가 됐습니다. 단종이라는 인물이 이렇게 많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릴 줄은 몰랐거든요.



    계유정난, 우리가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건

    혹시 학교 역사 시간에 단종을 제대로 배운 기억이 있으신가요? 저는 솔직히 없습니다. 세종대왕, 이순신, 광해군은 줄줄 외웠는데 단종은 그냥 "폐위된 왕" 정도로만 기억했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배경이 얼마나 무거운 사건인지 실감했습니다.

    1452년, 이홍위는 열두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듬해 숙부인 수양대군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하는데요. 여기서 계유정난이란 1453년 수양대군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실권을 차지한 쿠데타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조카의 왕위를 삼촌이 강제로 빼앗은 사건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잖아요. 실제로 왕을 몰아낸 편이 공신이 되고, 왕을 지키려 한 신하들이 역적으로 몰렸습니다. 학교 교과서에서 단종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 이유에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영월 유배지 청령포로 이야기를 옮겨갑니다. 한명회라는 인물이 영화 내내 "역적"이라는 명분으로 단종의 측근들을 차례로 처단하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진짜 역적은 누구였을까요?

     

    유해진과 박지훈, 두 사람의 유대감이 영화를 살렸다

    영화를 보기 전에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단종의 결말은 이미 역사가 알려준 비극이잖아요. 결말을 다 아는 이야기를 2시간 가까이 따라가야 한다는 게 지루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니 그 우려가 무색했습니다. 비결은 엄홍도라는 인물에 있었습니다.

    영월 광천골의 촌장 엄홍도를 연기한 유해진 배우는, 제가 경험상 이 역할 말고는 떠오르는 배우가 없을 정도로 딱 맞는 캐스팅이었습니다. 흙냄새 나는 따뜻함과 투박한 정이라는 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화면에서 그게 그냥 느껴지거든요. 물론 유해진 배우 특유의 캐릭터와 결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엄홍도를 이만큼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단종 역의 박지훈 배우도 눈빛 하나로 감정 전달이 되는 배우였습니다. 사극 인물치고 너무 이목구비가 뚜렷하다는 느낌이 살짝 있긴 했지만, 그 눈빛에서 무언가를 누르고 있는 억압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에도 단종이 활쏘기에 능하고 총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영화 속 단종의 눈빛이 그 기록과 묘하게 겹쳐 보였습니다.

    영화 초반 광천골 일상 장면이 길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시간이 두 사람의 유대감을 쌓는 데 꼭 필요한 호흡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유대감이 없었다면 결말의 무게가 절반도 안 됐을 거예요.

    • 엄홍도(유해진): 단종의 일상을 감시하는 보수주인이자, 점차 그의 인간적인 면에 마음을 여는 촌장
    • 단종(박지훈): 열다섯에 유배된 폐위된 왕. 눈빛만으로 억눌린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력이 돋보임
    • 두 인물의 유대감 형성: 영화 전반부의 일상 장면들이 이 유대감을 쌓는 핵심 장치로 기능함

    한명회, 이 빌런이 더 나왔다면 어땠을까

    유지태 배우가 연기한 한명회는 이 영화에서 가장 신선하게 느껴진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보통 한명회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간교하고 기름진 느낌의 간신, 뭔가 눈빛이 교활한 그런 인물 아닌가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과 야사 기록인 신도비명(神道碑銘)에 묘사된 한명회는 전혀 달랐습니다. 여기서 신도비명이란 고위직 관료나 왕족이 사망한 후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 글로, 당대의 공식적인 평가에 가깝습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한명회는 얼굴이 잘나고 키가 크며 무리 중에서 돋보이는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유지태 배우가 이 역할을 위해 몸무게를 100kg까지 증량했다고 하는데, 그 거구에서 나오는 위압감이 스크린에서 실제로 느껴졌습니다.

    제 경험상 사극에서 빌런의 무게감이 약해지면 주인공의 비극도 가벼워지거든요. 그런 점에서 유지태의 한명회는 단종의 처지를 더 처참하게 만드는 역할을 충분히 해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한명회가 영화에서 조금 더 자주 등장했다면 극 전체의 긴장감이 한층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결말 해석, 단종은 정말 무기력한 왕이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결말을 알면서 봤는데도 그랬습니다. 그냥 슬픈 게 아니라, 무언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어요. 혹시 이 영화 보신 분들도 같은 감정 느끼셨나요?

    금성대군 중심의 복위 거사가 고변으로 발각되고, 단종은 결국 영월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를 명받습니다. 여기서 사사란 왕명으로 사약을 내려 죽이는 처형 방식을 의미합니다. 역사적 결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야사(野史)를 재해석해서 엄홍도의 손으로 단종이 생을 마감하게 합니다. 여기서 야사란 공식 역사서가 아닌 민간에 전해지는 비공식 기록으로, 정사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장항준 감독은 단종이 스스로 엄홍도에게 부탁했다는 방식으로 결말을 구성했는데, 이는 단종이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가졌던 인물임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실제로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출처: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단종은 활쏘기에 능하고 세종대왕이 총애했던 총명한 손자였습니다. 폐위(廢位), 즉 왕위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된 것이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는 거죠. 제가 학교에서 단종을 배울 때는 그냥 "쫓겨난 왕"으로 끝났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인물을 제대로 본 기분이었습니다.

    만약 세조가 아닌 단종의 시대가 열렸다면 어땠을까요?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이 영화가 600만, 천만 관객을 끌어모은 데는 우리 안에 그런 가정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명량이 일본을 무찌르는 속 시원함으로 흥행했다면, 왕과 사는 남자는 그 반대편, 지지 못한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천만을 넘긴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