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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베니스에서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이 은사자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황금사자상을 가져간 작품이 더 궁금해졌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덴마크·이집트계 메이 엘투키 감독의 신작 <마리가 뭐 어때서>(원제: Woman Unknown)입니다.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과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가져간, 이번 영화제의 가장 큰 화제작입니다.
베니스의 선택 — 이창동을 제치고 정상에 오르기까지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La Biennale di Venezia)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로, 매년 이탈리아 리도섬에서 열립니다. 여기서 '3대 영화제'란 베니스·칸·베를린을 가리키며, 각 영화제의 최고상은 각각 황금사자상(Golden Lion), 황금종려상(Palme d'Or), 황금곰상(Golden Bear)으로 불립니다. 이 세 상이 국제 영화계에서 갖는 권위는 아카데미상과는 결이 다른, 예술적 완성도를 우선시하는 평가라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깊습니다.
이번 경쟁 부문은 그 어느 해보다 라인업이 강력했습니다. 24년 만에 베니스 경쟁 부문으로 돌아온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 마틴 맥도나의 <와일드 호스 나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까지 거장들이 총출동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사전에 해외 반응을 살펴봤을 때만 해도 <마리가 뭐 어때서>는 강력한 다크호스 정도로 거론되는 수준이었고, 솔직히 황금사자상을 가져갈 거라고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과를 보니 심사위원단의 선택은 명확했습니다. <마리가 뭐 어때서>는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가능한 사랑>은 2등상인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에 올랐습니다. 더 눈길을 끈 건 황금사자상 수상작의 주연 배우가 볼피컵 여우주연상까지 동시에 수상했다는 점입니다. 볼피컵(Volpi Cup)이란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여하는 연기 부문 최고상으로, 황금사자상 수상작과 연기상이 동시에 돌아가는 경우는 영화제 규정상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만큼 이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단의 평가가 압도적이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가능한 사랑>에서 전도연 배우의 연기를 기다려온 입장에서, 볼피컵마저 다른 작품에 돌아갔다는 건 솔직히 속이 쓰리더군요. 매기 질렌할 심사위원장의 평소 사회적 발언들을 떠올리면, 개인적 취향과 가치관이 이번 황금사자상 향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건 아닌지 조심스러운 의심도 들었습니다.
- 황금사자상(Golden Lion): 베니스국제영화제 최고 작품상, <마리가 뭐 어때서> 수상
-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 2등상에 해당,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 수상
- 볼피컵(Volpi Cup) 여우주연상: <마리가 뭐 어때서> 주연 마틸드 아르셀 수상
- 메이 엘투키 감독: 역대 8번째 여성 감독 황금사자상 수상이라는 기록 동반 달성
덴마크영화가 건드린 것 — 전쟁 이후, 누구의 몸이 심판받았는가
영화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치 점령에서 막 벗어난 덴마크입니다. 주인공 마리는 부유한 공장주 크리스티안의 집에서 하녀이자 딸의 보모로 일하다, 이제 고용주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상류층으로 진입하는 문턱 바로 앞에 서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마리의 과거까지 사라진 건 아닙니다. 전쟁 당시 독일군 병사와 맺었던 비밀스러운 관계가 수면 위로 떠오를 위기에 처하면서 이야기는 팽팽하게 당겨집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바라본 부분은 '수평적 협력(horizontal collaboration)'이라는 역사적 개념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수평적 협력이란 전쟁 점령기에 적국 병사와 성적 관계를 맺은 여성들을 지칭하는 역사 용어로, 전후 유럽 각지에서 이 여성들은 매국노이자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낙인찍혀 공개적으로 처벌받았습니다. 덴마크에서도 전쟁이 끝난 직후 이런 여성들은 거리에서 머리를 깎이고 몸에 나치 상징이 그려지는 잔혹한 방식으로 응징당했습니다. 메이 엘투키 감독은 이 역사적 사실을 배경에 깔고, 마리 한 사람의 생존 이야기를 통해 훨씬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출처: La Biennale di Venezia 공식 사이트)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나치 점령기 동안 경제적·정치적으로 점령군과 타협하거나 협력한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기준이 적용됐던 반면, 왜 여성의 몸과 성적 선택만이 국가에 대한 충성 여부를 가르는 척도가 됐느냐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사회가 필요로 했던 '정화의 제물'이 특정 여성들에게만 집중됐다는 구조를 영화는 마리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줍니다. 직접 살펴보니, 이 영화에서 전쟁은 전투가 끝난 순간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과 사회적 판단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메이 엘투키 감독의 전작 <퀸 오브 하츠>(2019)를 알고 있는 분이라면 이 감독이 인간의 욕망과 금기를 다루는 방식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그 작품을 봤을 때 느꼈던 건 감정을 과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도덕적 갈등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집요함이었는데, <마리가 뭐 어때서>에서도 그 특성이 그대로 이어진 듯합니다. 해외 비평계에서도 절제된 연출과 함께 전후 여성에게만 책임을 집중시켰던 역사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출처: Variety)
마틸드 아르셀의 연기 — 침묵으로 채운 볼피컵
제가 이번 수상 결과에서 주목한 건 볼피컵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마틸드 아르셀입니다. 아르셀은 덴마크의 신예 배우로, 이번 작품이 사실상 국제 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연기상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이 수상이 단순히 '신인의 깜짝 수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마리는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항상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새로운 삶을 잃지 않기 위해 감정을 억누릅니다. 과장된 표정이나 격렬한 감정 표출 없이 시선과 침묵, 미세하게 흔들리는 표정만으로 내면의 불안을 전달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아르셀은 이 어려운 과제를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절제된 연기는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격정적인 장면은 편집에서 강조할 수 있지만, 침묵의 연기는 배우가 실시간으로 모든 걸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마리는 단순한 피해자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때로 냉정한 선택을 하고, 불리한 상황을 계산하며 돌파하려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마리를 완전히 옹호하기도, 쉽게 비난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도덕적 모호함(moral ambiguity)이 이 인물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도덕적 모호함이란 인물의 선택이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런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에게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균형 감각이 요구됩니다. 베니스의 볼피컵은 한두 장면의 강렬한 연기보다는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인물의 복합적인 내면을 끝까지 지탱해낸 점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현재 <마리가 뭐 어때서>는 국내 개봉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앞서 이 작품을 <우먼 언노운>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접했을 때만 해도 국내 관객이 언제 볼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이번 황금사자상 수상으로 배급 가능성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봅니다. <가능한 사랑>을 통해 올해 베니스 경쟁작에 관심을 갖게 된 분이라면, 그 작품과 같은 무대에서 경쟁해 최고상을 가져간 이 작품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일 겁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마리가 뭐 어때서 국내 개봉은 언제인가요?
A. 이 글을 쓰는 시점 기준으로 국내 개봉일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황금사자상과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수상한 만큼 국내 배급사의 관심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고, 개봉이 성사된다면 <가능한 사랑>과 함께 올해 베니스를 빛낸 두 작품으로 비교 감상하는 재미도 있을 겁니다.
Q. 가능한 사랑은 왜 황금사자상을 못 받은 건가요?
A. <가능한 사랑>은 2등상인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24년 만에 베니스 경쟁 부문에 복귀한 작품인 만큼 강력한 후보로 거론된 건 사실이지만, 최종 선택은 심사위원단의 몫입니다. 저는 매기 질렌할 심사위원장의 개인적 관점이 이번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Q. 메이 엘투키 감독의 전작도 볼 만한가요?
A. 전작 <퀸 오브 하츠>(2019)는 인간의 욕망과 금기를 섬세하게 다룬 작품으로 당시 해외 비평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마리가 뭐 어때서>와 비슷한 절제된 연출 스타일을 갖고 있어서, 이번 수상작에 관심이 생겼다면 전작부터 먼저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Q. 볼피컵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랑 같은 건가요?
A. 볼피컵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수여하는 연기 부문 최고상으로, 아카데미상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아카데미가 흥행과 대중성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상이라면, 볼피컵은 예술적 완성도와 연기의 깊이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영화제 권위상입니다. 이번처럼 황금사자상 수상작의 배우가 볼피컵까지 받는 건 영화제 역사에서도 드문 일입니다.
결론
<마리가 뭐 어때서>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여성의 몸이 어떻게 이념과 사회적 판단의 도구로 이용됐는지를 한 개인의 이야기로 좁혀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황금사자상과 볼피컵 동시 수상은 작품과 배우 모두에 대한 심사위원단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여주는 결과였습니다. <가능한 사랑>의 황금사자상 수상을 바랐던 입장에서 솔직히 아쉬움은 남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작품이 베니스에서 어떤 이유로 선택받았는지는 분명히 이해가 됩니다.
국내 개봉이 확정된다면 <가능한 사랑>과 함께 올해 베니스 경쟁 부문을 채운 두 작품으로 나란히 보는 경험이 꽤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느린 전개와 무거운 분위기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는 평도 있지만, 제 경험상 이런 영화는 극장을 나오고 나서 더 오래 머릿속에 남는 편입니다.